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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선조실록의 편찬 경위, 선조실록의 내용

by yesG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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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실록》은 선조(宣祖) 재위 기간(1567 명종 22년 7월∼1608 선조 41년 1월) 41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정식 이름은 《선조소경대왕실록》이며, 모두 221권 116책으로 활판 간행 간행됐습니다. 선조의 묘호는 처음에 선종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선조실록》의 판심에는 《선종대왕실록》이라고 인각되어 있습니다. 광해군 8년(1616) 8월에 묘호를 선조로 개정하면서 실록의 표제도 《선조소경대왕실록》이라고 하게 됐습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원년(1609) 7월 12일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8년(1616) 11월에 완성했습니다. 처음에는 서인 이항복이 총재관이 되어 편찬을 했으나, 뒤에는 북인인 기자헌이 담당했습니다. 《선조실록》은 그 대부분이 선조 25년(1592) 임진 왜란 이후 16년간의 기사로 되어 있으며, 전체 221권 중 195권에 달합니다. 반면 선조 즉위년(1567)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약 25년간의 기사는 모두 26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임진왜란 때 <시정기>와 《승정원일기》 등의 공공 기록과 사초들이 대부분 소실되어 실록 편찬의 자료가 부족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료의 보완을 위한 논의가 일찍부터 제기됐습니다. 또한 《선조실록》이 광해군 때 대북 정권의 주도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서인과 남인들에게 불리한 기사가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후 《선조수정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어 효종 8년에 완성됐습니다. 

선조실록의 내용

선조(1552∼1608)의 이름은 연, 초명은 균으로,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과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셋째 아들입니다. 처음에는 하성군에 봉해졌습니다. 명종은 외아들 순회세자가 1563년에 죽고 후사가 없었으므로 1567년 7월 3일 임종 때 유명을 내려 하성군을 후계자로 즉위케 했습니다. 선조의 치세에는, 사림세력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사림정치의 기반을 확립했습니다. 전대의 훈척정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눠지고, 학연·지연·혈연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는 붕당정치가 발생했습니다. 선조의 즉위 초에는 구체제를 혁신하려는 사림 세력과 훈구 세력간의 갈등으로 대립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훈구 세력은 점차 몰락하고, 사림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1575년 (선조 8) 심의겸과 김효원 간의 갈등으로 인하여 동·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정여립 모반 사건으로 인한 기축옥사 처리 문제로 1589년(선조 22) 동인은 다시 남·북인으로 분열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남인이 유성룡을 위시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으나, 전후 수습 과정에서 남인이 실각하고 북인이 대신 정국을 주도했습니다. 북인 세력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또 다시 대북·소북 등으로 분기하게 됐습니다. 선조는 즉위초에 학문에 정진하였고,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등을 존숭하여 증직과 시호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치도에 관계되는 유교 서적과 《삼강행실도》 등을 인쇄하여 간행했습니다.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 등에게 증직하고, 사림들을 신원하는 한편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 등은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했습니다. 또 을사사화를 일으킨 윤원형 등을 삭훈했습니다. 명나라 《대명회전》에 태조 이성계가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으로 잘못 기록되어 있었는데, 200년간이나 숙제로 내려오던 것을 윤근수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종계를 변무했습니다. 선조 16년(1583)과 20년(1587)에는 야인 이탕개의 침입으로 경원부가 함락되자, 온성부사 신립 등을 시켜 그들을 물리치고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했습니다. 선조 23년(1590)에는 왜 동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으나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상반된 보고를 함으로써 국방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리하여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조선 관군이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지자, 선조는 개성과 평양을 거쳐 의주로 피난하는 한편,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원병을 청했습니다.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분조를 설치하여 의병과 군량을 확보하도록 했습니다. 곧 전국에 의병이 봉기하여 왜적의 후방을 위협하였고 관군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다에서는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수군이 한산도대첩으로 제해권을 장악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는데 크게 공헌했습니다. 명의 원병과 관군이 합세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권율의 행주대첩으로 선조 26년(1593) 10월에 서울로 환도하여 질서를 정비하고 전국을 수습했습니다. 임진왜란 중에는 군공을 세우거나 자나 납속을 한 자들에게 공명첩이나 실직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 조선후기 신분 변화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또 왜란 중에 궁궐이 불에 타고 귀중 도서가 소실되자 각처에 흩어진 서적들을 수집 보관했습니다.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때의 논공행상을 시행하여 호성, 선무, 청난 등의 공신을 녹훈했습니다. 전쟁을 마무리를 지은 후에는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습니다. 선조는 재위 41년 되던 해(1608) 2월 1일 별궁인 경운궁에서 승하하였다. 향년 57세. 묘호는 처음에 선종으로 정하였으나 광해군 8년(1616) 8월에 선조로 개정했습니다. 시호는 소경, 존호는 정륜입극성덕홍렬지성대의격천희운현문의무성예달효, 능호는 목릉이며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내에 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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