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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선조수정실록의 편찬 경위, 편수관, 선조수정실록의 내용

by yesG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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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선조수정실록》은 인조~효종 때 《선조실록》을 수정하여 보완한 사서로, 정식 이름은‘선조소경대왕수정실록이며, 모두 42권 8책입니다. 《선조실록》은 광해군 때 북인인 기자헌, 이이첨 등이 중심이 되어 편찬했으므로 당파관련 서술에서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서인으로 지목된 이이, 성혼, 박순, 정철 및 남인 유성룡 등에 대하여는 없는 사실을 꾸며서 비방하고, 이산해, 이이첨 등 북인에 대해서는 시비선악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623년 인조 반정으로 북인 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곧바로 실록을 수정하자는 의견이 나오게 됐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선조실록》의 잘못된 사실과 누락된 부분을 수정·보완하기 위하여 편찬한 것입니다. 인조 즉위 초에 경연관 이수광·임숙영 등이 실록 수정을 건의하였고, 좌의정 윤방도 수정을 역설했으나 여러 가지 사정으로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인조 19년(1641) 2월에야 대제학 이식의 상소로 실록 수정을 결정하고, 이식에게 이를 전담시켰습니다. 이식은 인조 21년(1643) 7월에 예문관 검열 심세정과 함께 적상산 사고에 가서 《선조실록》 중 수정할 부분을 초출했습니다. 그리고 수정 실록청을 설치하고 가장사초와 비문, 행장, 야사, 잡기 등 자료를 수집하여 수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인조 24년(1646) 정월에 이식이 다른 일로 파면되어 사망하였기 때문에 실록 수정 사업은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효종 8년(1657) 3월에 이르러 우의정 심지원의 요청으로 경덕궁의 승정원에 수정실록청을 설치하고, 영돈녕부사 김육과 윤순지, 이일상, 채유후 등으로 하여금 사업을 계속하게 하여 그해 9월에 완성했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은 1년을 1권으로 편찬하였기 때문에 총 42권 8책이 됐습니다. 선조 즉위년부터 동 29년까지의 30권은 이식이 편찬하였고, 선조 30년부터 동 41년까지의 12권은 채유후 등이 편찬했습니다. 당쟁이 일어나기 이전의 실록 편찬에는 이러한 문제가 없었으나, 당론이 치열하게 일어난 이후의 실록은 편찬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당파에는 유리하게, 반대당에는 불리하게 기록되는 등 기사 내용의 공정성과 시비곡직에 문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반대당이 집권을 하게 되면 이를 수정하여 다른 실록을 편찬하려는 시도가 있게 됐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이 바로 그 효시를 이루었고, 후에 《현종개수실록》 과 《경종수정실록》이 편찬된 것도 이러한 연유에서였습니다.

선조수정실록의 내용

《선조수정실록》은 전체 내용이 원본의 1/5에 지나지 않지만, 중요한 사건에 대하여 필요한 기사를 많이 보완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 범례에 의하면 《선조실록》의 결점과 수정 보완한 내용은 아래와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1) 《선조실록》은 명예를 훼손하고 진실을 잃은 사실이 근거도 없이 잡다할 뿐 아니라, 대개의 인명·지명·관직명 등 대체로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일도 착오가 많으며, 명신들의 주소가 모두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들을 보완합니다. 2) 야사에서 채록하여 날짜별로 기록할 수 없는 것은 월별로 기록하고, 해당 달도 분명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해의 끝에 써 넣습니다. 3) 먼저 강령에 실린 사실을 기록한 다음 잡기와 비·지·행장 순의 차례로 기록하고, 국사에 관한 것이나 다른 사람의 득실을 기록한 것을 모두 자세히 채록합니다. 4) 야사나 지장 류는 한결같이 공론에 입각하여 간략히 사실을 기록합니다. 5) 한 사건에 대하여 기록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내용을 합쳐 간략하게 줄입니다. 이미 확인된 사실이거나 여러 사람들이 인정한 논의는 모두 그 내력에 근거하여 기록합니다. 6) 《선조실록》에서 자세하고 정확히 기록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에 싣지 않고, 단지 그 대략만 남겨두어 사건의 개요를 알게 합니다. 7) 《선조실록》은 간당들이 편찬을 총괄하여 관장하면서 사실을 줄이고 덧붙이기를 자기 마음대로 했습니다. 그들이 포창한 인물은 자기 자신 및 자기와 친밀한 몇 사람에 불과했고, 그들이 비방한 사람들은 모두 선조대에 신임 받던 명신들이었습니다. 간흉들 스스로 포창하고 꾸민 부분은 역사를 기록하는 예에 의하여 얼마간의 공의를 붙여 둡니다. 8) 명신의 장소 중 시비와 관계가 깊거나 후세의 귀감이 되는 것들은 모두 싣기도 하고 일부분을 뽑아서 싣기도 합니다. 9) 《선조실록》 중에서 사실을 속이고 잘못 편찬한 실상과 이제 수보하는 뜻을 차례로 언급하고 얼마간의 사론을 지어 그 말미에 붙입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을 날짜별로 비교 검토하면 몇 가지 수정의 취지를 알 수 있는 단서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범례에 따라 《선조수정실록》에서 수정된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수정본은 원본을 보완한 기사가 많지만, 대부분 특정 사안을 중심으로 보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주로 선조대에 당론과 관련되었던 동서분당, 기축옥사, 임진왜란에 대한 기사들입니다. 윤원형의 집에 드나들었다는 김효원의 행적에 대한 심의겸의 비판과 척신이므로 심의겸의 동생 심준겸을 이조 낭관에 임명할 수 없다는 김효원의 비판 등에 대하여 수정본에서는 그 전모를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김효원을 지지하는 허엽과 허엽을 비판하는 정철과 신응시 등에 대해 가졌던 이이와 김우옹의 우려와 조정 노력 및 전후 배경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조 22년(1589) 정여립이 모반하였다는 기축옥사에 대하여는 원본과 수정본 모두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관이었던 정철이 조작 또는 확대했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수정본에서 정철이 최영경을 구원하고자 한 일을 들어 원본의 기록이 적절하지 않다는 견해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진왜란에 대하여는 의병활동에 대한 기사 보완이 많습니다. 곽재우·고경명·정인홍·손인갑·김천일, 조헌·영규·유종개의 활동, 이광·윤국형의 백의종군, 김덕령과 이산겸이 무고로 하옥되었던 일 등 의병활동을 많이 보완했습니다. 또한 명군의 소극적 전술, 중국 사신의 이간질 등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도 많이 보완되어 있습니다. 이순신에 대한 기록도 수정본에서 많이 보완됐습니다. 이순신의 승전, 이순신과 원균의 틈이 생긴 이유 등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고, 당시 조정이 원균의 편을 들었으며 그로 인해 이순신 하옥됐거나, 원균이 이순신의 수군제도를 변경하여 패배했다는 등의 자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수정본은 원본의 사론을 수정하거나 새로운 사론을 붙인 것이 많습니다. 특히 인물에 대한 비판 사론에서 그러한 것이 많습니다. 원본과 수정본에서 평가의 일치를 본 인물은 홍여순과 이충두 사람인데, 둘 다 비판적인 내용입니다. 원본에서는 높이 평가했는데, 수정본에서 비판한 인물은 이이첨·기자헌·박홍구·정인홍· 이희득·심종도 등으로 이들은 모두 대북 인사들입니다. 원본에서 비난하였으나 수정본에서 칭찬한 인물들은 한준겸 같은 유교 7신, 이덕형· 이현영 같이 당색을 떠나 중망을 받던 인물은 물론, 유성룡·정구 등 남인 관료나 학자, 서인 계열인 성혼·이항복·윤두수·신흠· 이정구 및 신진인 김상헌 등이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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