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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정족산본-광해군일기 중초본의 편찬 경위, 내용

by yesG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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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일기 정초본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광해군일기》 정초본은 수정 보완된 중초본을 정서하여 완성한 필사본입니다. 따라서 이것이 곧 광해군대의 최종적이고 공식적인 실록 즉 《광해군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모두 187권 40책이며,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정초본은 편찬과 교정이 끝난 실록의 최종 원고 즉 완성본을 말하는데, 인쇄의 대본이 되는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정초본은 극히 일부분(제1~5권 전 부분과 제6, 7권의 일부)만 인쇄됐고, 나머지 부분은 해서체로 정서되어 있습니다. 정초본은 중초본의 내용들을 대거 산삭 정리하였으므로 전체의 분량이 1/3 정도 축소된 것입니다. 중초본(태백산본)이 187권 64책인데 비하여, 정초본은 187권 40책으로 편철되어 있습니다. 《광해군일기》는 여러 왕대에 걸쳐 인쇄코자 했으나, 제7권(즉위년 8월) 일부까지만 이뤄지고 그 뒷부분은 끝내 인쇄되지 못했습니다. 나머지 180권은 현재까지 정서본 형태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광해군일기》는 10년 11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 수정을 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편찬됐습니다. 대체로 1624년 (인조 2년) 7월부터 1627년(인조 5년) 1월까지의 1단계와 1632년(인조 10년) 1월부터 1633년 12월까지의 2단계에 걸쳐 편찬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624년 6월 일기찬수청을 남별궁에 설치하고 실록청의 예에 준하여 총재관과 도청 및 각방의 당상· 낭청을 임명하고, 그해 7월부터 편찬에 착수했습니다. 그러나 1627년(인조 5년) 1월에는 후금의 침입하자 편찬 사업은 중지되고 《일기》의 중초본과 중요 문서들을 강화도에 옮겼습니다. 이 1단계까지는 《광해군일기》 187개월분 가운데 130개월 분이 중초본으로 완성되고 그 나머지 57개월 분은 초고 상태로 남게 됐습니다. 1627년 8월에 정묘호란이 수습된 뒤에도 정세가 안정되지 못하여 편찬 사업을 착수할 수 없었고, 국가 재정의 고갈과 변방의 위태로운 국면 때문에 오래 동안 중지됐습니다. 1632년(인조 10년) 2월에 가서야 다시 찬수청을 남별궁에 다시 설치하고 편수 관원을 임명하여 편찬을 속행했습니다. 그리하여 1633년(인조 11년) 9월까지 133개월분이 중초로 작성되고, 그 해 12월에 187개월분 모두가 중초본으로 작성됐습니다. 편찬된 《광해군일기》 중초본은 다시 정서하고 인쇄해야 했으나, 재정의 고갈 및 《선조수정실록》의 편찬 문제 등으로 인쇄하지 못하고, 몇 벌을 정서하여 보관하게 됐습니다. 그 결과 1634년(인조 12년) 5월 《광해군일기》 187권을 묶어 정서하여 정초본 40책으로 두 벌을 만들어 강화도의 정족산 사고와 전라도 무주의 적상산 사고에 각각 보관했습니다. 중초본은 64책으로 만들어 경상도 봉화의 태백산 사고에 보관했습니다. 《광해군일기》 편찬의 자세한 경위와 거기에 참여한 관원들의 명단 및 체제와 내용상의 차이는 앞 중초본의 해제를 참고하기 바랍니다.

광해군일기의 내용

《광해군일기》는 사료의 산일과 인조반정에 의하여 집권한 서인들이 편찬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주관적인 비판이 많이 작용했습니다. 정초본이 곧 완성본이므로 이것이 곧 본래 의미의 《광해군일기》입니다. 그러나 중초본에서 삭제된 많은 내용들도 당시의 실정을 알려주는 귀중한 정보들을 담고 있으므로 오늘날의 역사 연구에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습니다. 그 삭제되거나 보완된 내용들을 비교 분석해 보면 당시의 실록 편찬자들의 정치적 입장이나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 두 본을 종합하여 광해군대의 역사를 요약해 봅니다. 광해군(1575~1641)의 이름은 혼이며 선조와 공빈김씨의 둘째 아들입니다. 광해군은 1592년(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있었던 4월 29일 신하들의 간청으로 서둘러 세자에 책봉됐습니다. 형인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가 총명하고 효경스럽다는 이유로 지명된 것입니다. 다음날 선조와 조정은 피난길에 올랐는데, 도중 영변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국왕과 세자가 분조를 하게 됐습니다. 광해군은 국사권섭의 권한을 위임받아 7개월 동안 강원·함경도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는 등 분조 활동을 했습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에서 모병·군량 조달 등의 일을 맡았습니다. 1594년에는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주청했으나, 장자인 임해군이 있다 하여 거절당했습니다. 1606년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탄생하자 그의 세자 지위는 매우 위태로웠으나 정인홍 등 북인의 지원으로 1608년 선조의 뒤를 이어 즉위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즉위한 후에도 명에서는 한동안 고명을 거부하여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임해군을 교동에 유배하고 유영경을 사사하는 등 파란이 있었습니다. 광해군은 즉위 초 당쟁의 폐해를 막기 위해 이원익을 등용하고 초당파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습니다. 1612년에는 김직재의 무옥으로 100여 인의 소북파를 처단했으며, 1613년에는 박응서 등 7서의 사건이 일어나 인목왕후의 아버지 김제남을 사사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삼아 강화에 위리안치했다가 죽게 했습니다. 1615년에는 대북파의 무고로 신경희와 능창군 전을 제거하고, 1618년에는 폐모론이 일어나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켰습니다. 이와 같은 실정으로 광해군은 큰 비난을 받았는데, 대부분 대북파의 책동으로 빚어진 것이었습니다. 광해군 때는 국가 재건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이 시행됐습니다. 1608년에는 선혜청을 두어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했고, 1611년 양전을 실시해 경작지를 넓혀 재원을 확보했습니다. 1609년에는 창덕궁을 재건하였고 1619년에 경덕궁, 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했습니다. 1616년 후금이 건국되자 국방을 강화하는 한편, 1619년에는 명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강홍립에게 1만여 명을 주어 후금을 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르허 전투에서 패한 후에는 명과 후금 사이에서 외교적인 균형을 취했습니다. 1609년에는 일본과 기유약조를 체결하고 중단되었던 외교를 재개했으며, 1617년 오윤겸 등을 회답사로 일본에 파견했습니다. 광해군 때는 《신증동국여지승람》·《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을 다시 간행하였고, 《국조보감》·《선조실록》을 편찬했으며, 적상산성에 사고를 설치했습니다. 광해군은 1623년 3월 인조반정으로 실각하여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가 1641년 서거했습니다. 그는 종묘에 들어가지 못하여 묘호, 존호, 시호를 받지 못하였고, 왕자 때 받은 봉군 작호인 “광해군”으로 호칭되었다.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송릉리에 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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