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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인조실록 편찬 경위, 인조실록의 내용

by yesG 2023.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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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실록 편찬 경위

《인조실록》은 조선 제16대 국왕인 인조의 재위 기간(1623.3. ~ 1649.5.) 26년 2개월 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정식 이름은 《인조대왕실록》이며, 모두 50권 50책으로 활판 간행됐습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습니다. 《인조실록》은 인조가 승하한 다음해인 1650년(효종 1) 8월 1일 춘추관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실록의 편찬은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진행되었고 특별한 난관은 없었습니다. 다만 인조는 반정에 의하여 전 왕을 폐하고 즉위하였기 때문에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했습니다. 《인조실록》은 1653년(효종 3) 6월에 완성됐습니다.

인조실록의 내용

인조(1595~1649)의 휘는 종이며, 자는 화백입니다. 아버지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 부(후에 원종으로 추존)이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입니다. 1607년(선조 40)에 능양도정에 봉해지고, 능양군에 진봉됐습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13일에 반정으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경운궁 에서 즉위했습니다. 인조는 즉위 직후에 민심의 수습을 위해 12개의 도감을 혁파하고, 여러 죄인들을 사면했으며, 각종 토목 공사를 중지했습니다. 왕실의 척족이나 권신들의 전장과 감세· 복호 등을 조사·개혁하며, 내수사·대방군에 빼앗긴 민전을 일일이 환급하도록 했습니다. 반정 이후 논공 행상에서 공이 컸던 이괄을 2등공신으로 녹공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했습니다.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에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괄의 군대가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까지 남천했습니다. 그러나 이괄의 반군이 도원수 장만이 이끄는 관군에 의하여 격파되고 진압되자 서울로 환도했습니다. 인조 대에는 대북파가 대부분 제거되고 반정의 주역이었던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광해군 때 조정에서 축출당했거나 퇴거하고 있던 남인 계열 인사들 및 재야 사림들이 주로 등용됐습니다. 인조대의 이러한 인재등용은 정국 운영에 중요한 계기가 되고, 붕당간의 세력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됐습니다.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 정책을 써서 탄력있는 외교 관계를 유지했으나, 인조와 서인 세력은 반정의 명분을 중시하여 친명배금정책을 썼습니다. 그 결과 1627년(인조 5)에 정묘 호란을 초래했습니다. 이때 후금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침략하여 의주를 함락시키고, 평산까지 쳐들어왔습니다. 이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고 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양국이 형제의 의를 맺는 강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청나라의 요구는 더욱 심해지고, 1636년에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제의를 하며 압박했습니다. 조선이 이 제의를 거절하자 청나라는 12월에 10만여의 군사를 이끌고 재차 침입했습니다. 이것이 병자호란입니다. 조정은 제대로 방어 대책을 세우지 못하고 봉림대군, 인평대군과 비빈을 강도로 보낸 뒤 남한산성에서 항거했습니다. 이때 강화 문제를 두고 척화파와 주화파 간에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결국 삼전도에서 항복하여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됐습니다. 병자호란으로 인하여 임란 이후 다소 회복되어 가던 국가 재정과 민생 경제가 극도로 악화되었고 사회상은 매우 비참했습니다. 1644년 청이 중원을 점령하자 다음 해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에서 풀려나 돌아왔는데, 곧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지 않고 차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 숙종때 예송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게 됏습니다. 후에 인조는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강씨를 죄에 엮어 사사했습니다. 인조대의 중요한 치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먼저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하였던 대동법을 1623년에 강원도에 확대 실시하여 점차 지역을 넓혀나갔고, 1624년에 총융청, 수어청 등 새로이 군영을 설치하여 국방에 대비했습니다. 1633년에는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청 나라와의 민간 무역을 공인했습니다. 함경도의 회령 및 경원 개시,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습니다. 1634년에는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세원을 확보했고, 세종 때 제정되었던 연등 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 최하등급의 토지를 기준으로 전세를 통일하여 고정시킨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습니다.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하여 납속사목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과 속죄를 실시했습니다. 1628년에는 제주도에 표류하여 귀화한 화란인 벨테브레(박연으로 표기)를 훈련 대장 구인후의 휘하에 배치하여 대포의 제작법과 사용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정두원 과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화포, 천리경, 과학 서적, 천주교 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며, 특히 소현세자는 천주교 선교사 탕약망과 사귀기도 했습니다. 송인룡, 김상범 등은 청나라에서 서양의 역법인 시헌력을 수입했고, 이는 1653년(효종 4)에 시행됐습니다. 인조는 학문을 장려하여 《황극경세서》, 《동사보편》, 《서연비람》 등의 서적을 간행했고, 김장생, 장현광, 김집 송시열, 송준길, 김육 등 우수한 학자들을 육성하여 조선 후기 성리학의 전성기를 이루도록 했습니다. 인조는 26년간 군림한 후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했습니다. 묘호는 인조, 존호는 헌문열무명숙순효이며, 능은 장릉으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리에 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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