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숙종실록의 편찬 경위, 숙종실록의 내용

by yesG 2023. 12. 19.
반응형

숙종실록의 편찬 경위

《숙종실록》은 조선 제19대 국왕 숙종의 재위 기간(1674.8~1720.6) 46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실록입니다. 정식 이름은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이며, 모두 65권 73책으로 간행됐습니다.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습니다. 권1·2를 1책으로 묶었고, 권13·14·15·32·34·38·50은 상·하 2책으로 각각 나누었으며, 권35는 상·중·하 3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숙종실록》은 숙종이 승하한 지 반년 후인 경종 즉위년(1720) 11월부터 편찬에 착수하여 영조 4년(1728) 3월에 완성했습니다. 실록 편찬에 9년의 세월이 소요됐는데, 이는 숙종의 재위 연수가 47년이나 되어 기사의 분량이 많았고, 편찬 도중에 노론·소론의 정쟁으로 신임옥사가 생기는 등 정국이 자주 바뀌고 편찬 책임자가 여러 번 변경되었기 때문입니다. 경종 즉위년(1720) 11월에 《숙종실록》의 찬수청을 설치할 때는 노론이 정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노론의 김창집이 실록 찬수의 총재관이 되어, 도청 및 1, 2, 3의 각방 당상과 낭청을 선임하여 실록을 편찬했습니다. 그러나 경종 원년 (1721) 12월에 신임옥사가 일어나자 김창집을 포함한 노론 사대신이 모두 처형되고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됐습니다. 이에 소론의 조태구가 총재관이 되고, 도청 및 각방 당상, 낭청도 대부분 소론으로 경질했습니다. 경종 3년(1723) 5월에 조태구가 총재관을 사면하고, 최석항이 대신 총재관이 되고, 그 후에 또 이광좌가 총재관이 됐으나, 모두 소론인 까닭으로 편찬 방침이 변경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경종 4년(1724) 8월에 경종이 승하하고 노론이 지지하던 영조가 즉위하게 되자, 이광좌 등 소론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노론의 정호·민진원·이관명 등이 정권을 잡게 되어, 실록청 책임자는 모두 노론으로 경질됐습니다. 즉 영조 원년(1725) 2월에는 노론의 정호가 총재관이 됐고, 뒤이어 이관명·민진원이 서로 이어가며 총재관이 되었으며, 이의현 ·이재·이병상·김재로·유척기 등이 도청 당상이 되어 실록 편찬을 계속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조 3년(1727) 9월에 편찬이 끝나고 인쇄를 마치게 됐습니다. 바로 그때 정미환국이 발생하여 소론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됐습니다. 소론은 정권을 잡은 후 실록을 개수하려고 했으나, 용이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때문에 각 권말에 빠진 기사를 보입하고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는다는 이른바 보궐 정오를 붙이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보궐정오편은 영조 4년(1728) 3월에 완성됐습니다. 현재 《숙종실록》 각 권말에 보궐 정오가 붙어 있는 것은 이런 까닭입니다.

숙종실록의 내용

숙종은 현종의 장자로서 휘가 순, 자가 명보이다. 현종 15년(1674) 8월 23일에 즉위하여 46년(1720) 6월 8일에 승하하였으므로 47년간 통치했습니다. 이 숙종이 재위한 시대는 조선 정치 사상, 정치 세력의 기복이 가장 심했던 기간으로 흔히 환국시기로 칭해지고 있습니다. 《숙종실록》의 주요 내용도 이 정쟁 문제에 치중되어 있습니다. 숙종은 1674년 8월에 14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는데, 6년에 경신 환국, 15년에 기사 환국, 20년에 갑술 환국이 일어나 그때마다 남인·서인 사이에 정국이 바뀌고 많은 사람이 희생됐습니다. 숙종 즉위년(1674) 9월에 진주 유학 곽세건이 상소하여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을 극론하여 공격했습니다. 이것은 제2차예송으로 위축된 서인의 당세를 말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숙종은 선왕(현종)의 묘지문을 송시열에게 짓게 했으나, 곽세건은 송시열이 복제를 잘못 판정하여 예제를 무너뜨리고 왕통 을 문란시켰으니, 선왕의 묘지문을 짓게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곽세건의 상소가 도화선이 되어 서인은 대부분 조정에서 축출되고 남인의 허목과 윤휴가 요직에 임명되어 정국을 담당하게 됐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을 처벌할 때 남인들은 준혹을 주장하는 ‘청남’과 완화를 주장하는 ‘탁남’으로 나뉘어 분쟁을 일으켰습니다. 서인은 숙종 6년 경신년 3월에 이른바 허견의 모역 사건을 고발하여, 여기에 관련된 남인들은 대부분 주살 축출하고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경신 환국’입니다.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다시 송시열에 대한 시비로 노론·소론으로 분열됐습니다. 경신환국에 주동적 활동을 한 인물은 서인의 김석주·김익훈 두 사람이었는데, 이들은 비밀 정탐으로 남인을 역모로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서인의 소장파인 지평 박태유·유득일, 대사성 조지겸, 교리 한태동 등이 그들을 탄핵했으나, 송시열은 김익훈이 스승 김장생의 손자라고 하여 두둔했습니다. 또 송시열과 제자 윤증에 갈등이 일어나 마침내 분열됐습니다. 송시열·김석주·김익훈 및 김만기·김만중·민정중·민유중 등을 지지하는 쪽은 노론이고, 박세채·윤증·조지겸·한태동·오도일 등을 지지하는 쪽은 소론이 됐습니다. 집권파인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열되어 서로 논박이 계속 부절하고 있는 차에 숙종 15년(1689)에 원자 정호의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숙종 6년에 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별세하고, 이듬해 7년에 계비 민씨가 책립되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있었는데, 후궁인 숙원 장씨가 숙종의 총애를 받아 14년 10월에 왕자(후일의 경종)를 낳았습니다. 숙종은 15년 정월에 왕자를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봉했습니다. 이때 봉조하 송시열이 시기상조를 주장하자 숙종은 송시열의 관작을 삭탈하고 서인 일파를 축출했습니다. 대신 남인인 권대운을 영의정으로, 목내선을 좌의정으로, 김덕원을 우의정으로 임명하고, 요직을 모두 남인으로 임명하여 정국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이어 희빈을 왕비로 승격시키고 경종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이에 남인들은 송시열을 제주에 위리 안치시켰다가 6월에 정읍으로 이배하는 도중에 사사하였다. 전월에는 김익훈을 장살하고, 이미 죽은 김석주는 관작을 추탈하였으며 서인 대신이었던 김수항도 유배지에서 사사했습니다. 그리고 경신옥사에 죽은 남인의 허적·윤휴·이원정 등은 모두 복관했습니다. 이를 기사 환국이라 합니다. 숙종 20년 갑술년 4월에 서인 중의 김춘택·한중혁 등이 민비 복위의 음모를 진행시키다가 음모가 고발됐습니다. 남인 우의정 민암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국청을 설치하고 실정을 밝힌 후 처형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2경에 숙종은 갑자기 정국을 변동시켜 국문에 참여한 남인의 대신 이하 고관들을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고 죄인들을 석방한 후 노론·소론을 불러들여 정국을 바꾸었습니다. 폐비 민씨는 다시 왕비로 복위되고, 왕비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봉 했습니다. 이를 갑술 환국이라 합니다. 후에 장희빈의 저주 사건 등이 일어나 처단하는 문제가 대두됐습니다. 소론 대신들은 세자 보호를 위하여 완화론을 주장했으나, 노론들의 준론에 몰려 장 희빈은 사사 됐습니다. 이에 소론의 최석정·남구만·유상운 등 대신들도 모두 찬축됐습니다. 이와 같이 숙종 시대에는 서인·남인의 정쟁이 격심하여 몇 차례의 정국 전환을 초래했습니다. 이는 국가나 민생을 위한 정책 대결이 아니라 주로 왕실에 관한 문제들, 즉 왕족의 복상, 왕자 책봉, 왕비 폐립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왕실의 전례 논쟁에는 위험한 항상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었지만, 여기에는 숙종 자신의 애증적 편향이나 변덕스러운 기질도 작용했습니다. 숙종은 왕실의 존엄성 유지와 왕권의 강화에 주력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역대 조종 중에 공적이 큰 태조와 태종에게는 존호를 올렸고, 인조와 효종은 세실로 정하였으며, 묘호가 없었던 공정왕에게는 정종이란 묘호를 올렸습니다. 또 세조에게 폐위된 노산군을 추복하여 단종 이란 묘호를 올렸으며 《노산군일기》를 《단종대왕실록》으로 고치고 그 전말을 기록한 부록을 찬집했습니다. 중종의 폐비 신씨에게는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게 하고, 소현세자빈 강씨를 복위시켰으며, 또 조선 초기 절의의 표본인 사육신을 복관시키고 민절서원 이라 사액했습니다. 이런 일들은 당시 병자호란 뒤에 존명대의를 주창한 일부 유신들의 건의에 따른 조치였습니다. 숙종은 호서·호남 지방에 시행하던 대동법을 영남에도 시행했으며, 상평통보라는 동전을 주조하여 시행했습니다. 서원의 중첩 설치를 금하고, 서북인의 임용을 장려했습니다. 군비면에서는 종래 사영이던 군제에 금위영을 더 만들어 오영 제도를 완성시켰으며, 대흥산성과 용강의 황룡산성을 수축하여 청군의 침입에 대비했습니다. 대마도의 왜사에게 왜인의 울릉도 침입 금지를 요구하여 23년(1697)에는 일본 막부로부터 금지시킨다는 회보를 받았습니다. 또 청국의 국경선확정 요구에 따라 38년(1712)에는 백두산 분수령(압록강과 두만강이 갈리는 곳)에 정계비를 세웠습니다. 숙종은 46년(1720)에 승하했는데, 묘호는 숙종이고, 존호는 장문헌무경명원효이고, 능은 명릉입니다. 출처: 국산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