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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 태조실록 편찬, 개수 경위, 내용

by yesG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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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편찬 및 개수 경위

태조실록은 태조 원년(1392)부터 7년(1398)까지 7년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정식 이름은 태조강헌대왕실록입니다. 모두 15권 3책이며, 처음에는 필사본으로 전해지다가 후에 활자로 간행됐습니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됐습니다. 태조는 재위 7년 만에 정종에게 양위하고 태종 8년(1408) 5월에 승하했습니다. 그 이듬해(1409) 8월 28일에 태종은 영춘추관사 하륜, 지춘추관사 유관, 동지춘추관사 정이오·변계량에게 명하여 태조실록을 편찬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멀지 아니하고 또 당시에 활동하던 인물들이 모두 살아 있으므로, 실록 찬수가 시기상조라 하여 후일을 기다리자는 건의도 있었으나, 태종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태조 원년부터 정종 2년까지의 사초를 각 사관에게 제출하도록 명하는 동시에, 하륜 등으로 하여금 이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태종 10년(1410) 정월부터 하륜·유관·정이오·변계량이 주가 되어 춘추관 기주관 조말생·권훈·윤회, 기사관 신장, 외사관 우승범·이심과 함께 태조실록 편찬에 착수하여 13년(1413) 3월에 15권을 완성했습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새로 편찬된 실록 가운데 번잡하고 중복된 기사가 많다 하여 개수하자는 주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세종 20년(1438) 9월에 이르러 헌릉(태종 릉) 비문의 오서 사건으로 인하여 다시 태조실록을 개수하게 됐습니다. 헌릉의 비문은 변계량이 지은 것인데, 태조 말년에 일어난 정도전의 난과 정종 2년(1400)에 일어난 박포의 난에 대하여 사실과 어긋난 점을 기록했으므로, 세종은 비문을 개수하게 하는 동시에, 태조실록과 이때에 이미 편찬을 완료한 정종실록 및 태종실록도 개수하게 했습니다. 개수가 완료된 것은 세종 24년(1442) 9월이며, 개수 담당자는 신개 ·권제 ·안지·남수문 등이었습니다. 그 뒤 세종 30년(1448)에 정인지가 다시 증수하고, 문종 원년(1451)에 고려 우왕을 신우로 고치는 간단한 개수가 있은 후 현재에 이르습니다. 태조실록은 여러 차례의 개수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내용의 정확성이 의심스러운 기사가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정도전의 난에 관한 기사와 우왕의 부자를 신씨로 단정한 것이 그러한 예입니다. 태조실록 15권이 처음 완료된 것은 태종 13년 3월이며, 정종실록(전 6권)은 세종 8년 (1426) 8월에 되었고, 태종실록(전 36권)은 세종 13년(1431) 3월에 완성됐습니다. 세종 27년 (1445)에 이들 3대(태조·정종·태종) 실록을 각기 네 질(4본)씩 필사하여, 한 질은 서울 춘추관에, 기타 세 질은 충주·성주 및 전주 사고에 각각 보관하도록 했습니다. 실록을 활자로써 인출한 것은 《세종실록》때 부터였습니다. 1592년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춘추관·충주·성주의 세 사고의 책은 모두 인멸되고, 오직 전주 사 고만이 온전했습니다. 난후인 선조 36년(1606)에 이르러 실록 복간의 의논이 일어나, 유일 원본인 묘향산 사고본을 도로 강화도로 이치하고, 인쇄에 착수하여 태조실록으로부터 명종 실록에 이르는 선대 실록을 세 질씩 복간했습니다. 완료된 해가 선조 39년(1606) 4년 월이었습니다. 신구 4본의 실록을 각 사고에 배치하되, 원본(구본)은 그대로 강화도 마니산 사고 에 두고, 재인본은 서울의 춘추관과 평안도 묘향산 사고, 경상도 태백산 사고에 나누어 두고, 초본(교정본)은 강원도 오대산 사고에 비치하게 했습니다. 인조 2년(1624) 이괄 난에 서울 춘추관 소장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어 다른 사고만이 남게 되었고, 묘향산의 실록도 얼마 후에 무주 적상산으로 옮기어 근세에 이르렀습니다.

 

태조실록의 내용

태조실록 제1권 첫머리에는 태조의 가계 내력 및 고려말 왕조 개창 이전까지의 약사 와 태조의 활동을 수록한 총서가 있습니다. 1392년 7월 17일 역성혁명으로 왕조가 개창되고 태조가 즉위한 이후부터는 일반적인 실록의 체제에 따라 연월일순으로 기사를 수록했습니다. 태조 는 1398년 9월 5일 왕위를 정종에게 물려주었지만, 정종 즉위년인 그해 12월 말일까지의 기사는 태조실록 제15권에 그대로 수록했습니다. 그 태조실록의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태조(1335~1408)의 본관은 전주, 초명은 성계, 자는 중결, 호는 송헌이었으나, 조선 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른 후 이름을 단, 자를 군진으로 고쳤습니다. 고려말 동북면의 신흥 군벌이었던 자춘의 둘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한기의 딸입니다. 태조의 고조인 이안사는 전주의 토호였으나 관기를 둘러싸고 지방관 들과 갈등을 빚은 일로 삼척으로 이주하였다가, 후에 해로로 동북면 덕원부로 옮겼습니다. 이 때 그의 휘하에는 전주의 민호 170여 호 등 많은 추종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들을 중 심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오동( 간도 지역) 지역의 여진족을 지배하고 원의 관직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와 손자 춘, 증손자 이자춘도 대 를 이어 두만강 지역을 지배하며 원으로부터 천호의 벼슬을 받았습니다. 태조의 아버지 이자 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 내응해 원나라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고려에 귀부했습니다. 그는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로 임명되어 동북면 지방의 실력자가 됐습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크게 활약하여 명성을 떨쳤습니다. 1361년 10월에는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 박의를 죽이고, 같은 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 해 이를 탈환하는데 앞장섰습니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의 대군을 함흥평야에서 격퇴했습니다. 또 동북면에 침범하여 기세를 올린 여진족을 쳐서 평온을 찾았습니다. 이 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의 호를 받았고 후 에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화령부윤 등에 임명됐습니다. 1377년(우왕 3) 에 는 경상도 일대와 지리산의 왜구를 대파하고,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의 왜구를 운봉에서 섬멸했습니다. 1382년 동북면 일대를 노략 질하던 여진족 호바투 군을 궤멸시켰습니다. 1384년에는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가 되었고, 1388년에 수문하시중이 됐습니다. 이 때 최영과 함께 임견미·염흥방을 주살했습니다. 이 해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문제로 최영이 요동 정벌에 나서자 태조는 우군도통사가 되 어 위화도까지 종군했으나, 결국 회군을 단행하여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했습니다. 그리고 정치·군사의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듬 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됐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신흥 정치세력인 급진 사대부 계층과 손을 잡고 새 왕 조 개창의 기반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1391년에는 삼군도총제사가 되었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했습니다. 익년 1392년 7월에 공양왕을 강압해 선양을 받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즉위했습니다. 태조는 즉위 초에 고려의 국호를 잇고 의장과 제도를 모두 고려의 것에 따랐다. 그 러나 차츰 구 제도를 개혁하여 새 왕조의 체제를 정비해 나갔습니다. 1393년(태조 2) 3월부터 국 호를 조선으로 개칭하고 다음 해에는 한양으로 천도했습니다. 1394년에는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을 비롯한 각종 법전이 편찬됐습니다. 조정에서는 유교를 건국 이념으로 하여 서울에 성균관을 세우고 지방에는 많은 향교를 세워 유학을 진흥했습니다. 1398년 8월 태조가 병을 앓고 있을 때 제5자인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정도전·남은 등 개국공신들을 살해하고 이복 형제들이었던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였습니다. 이에 태조는 방원의 요청으로 둘째 아들이었던 방과를 세 자로 결정했습니다. 이에 상심한 태조는 다음 달 왕위를 세자에게 선양하고 상왕으로 물러났습니다. 태조는 1408년 5월 24일 창덕궁 에서 승하하였다. 시호는 강헌, 존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 묘호는 태조이며, 능호는 건원릉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 경내에 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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