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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편찬 경위, 태종실록 체제와 내용

by yesG 2023. 1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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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편찬 경위

태종실록은 조선 제3대 국왕 태종의 원년(1401) 정월 1일부터 18년(1418) 8월 10일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정식 이름은 태종공정대왕실록이며 모두 36권 16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종 8년(1426) 8월부터 편찬하기 시작하여 세종 13년(1431) 3월에 완성했습니다. 세종 1년(1419)에 정종이 승하하고, 4년에 또 태종이 승하했습니다. 익년(1423) 12월 24일(신미) 춘추관의 지관사 변계량과 동지관사 윤회 등이 상서하여, 태종 때에 태조실록을 편찬한 예에 의하여 정종실록과 태종실록을 편찬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세종은 곧 이를 허락하고, 같은 달 29일(병자) 태종 즉위년(1400) 11월부터 18년(1418) 12월까지의 사관의 사초를 납입하게 했습니다. 실록의 편찬을 담당한 지춘추관사 변계량 등은 태종 시대의 사관의 사초를 거두어 들이는 한편, 사고에 이미 수집되어 있는 정종 시대의 사초와 정부의 기록 등, 모든 사료를 동부 연희방에 있는 덕흥사에 옮기고, 세종 6년 3월 1일(정축)부터 편찬에 착수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 8년 8월에 정종실록을 완료하고, 계속 태종실록을 편찬하던 중, 세종 12년 4월 22일(계사)에 변계량이 사망했습니다. 그러므로 동월 25일(병신) 편찬 사무소를 의정부 건물로 옮기고, 좌의정 황희와 우의정 맹사성으로 하여금 이를 감수하게 하여, 1년 후인 세종 13년 3월 17일(신사) 태종실록 36권을 완성했습니다. 태종실록을 감수한 사람은 처음에는 변계량, 후에는 황희·맹사성이었으나, 태종실록 끝에 기록되어 있는 수찬관 명단 중에는 변계량과 황희의 이름이 없습니다. 그것은 변계량이 중도에 사망하고, 황희는 실제로 감수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종실록 편찬에 관계한 춘추 관 당상은 감관사 맹사성, 지관사 윤회, 동지관사 신장이요, 당하관, 즉 낭청은 기주관 안지·윤형·조서강·이옹, 기사관 안수기·이선제·박시생·오신지·권자홍·장아·어효첨·김문기·강맹경·이종검 등 입니다. 태종실록은 편찬 직후 세종 13년(1431) 4월 25일(기미) 태조실록·정종실록과 함께 고려 시대의 실록을 보관하였던 충주 사고에 봉안했습니다. 그때까지 실록은 이 한 벌뿐이었고, 충주 사고는 민가가 밀집한 시내에 위치하여 화재의 염려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세종 21년(1439) 6월 사헌부의 건의로 새로 전주와 성주에 사고를 설치하고, 세종 27년(1445) 11월 19일(경인)까지 세 벌을 더 베껴 모두 네 벌을 만들어 춘추관·충주·전주·성주 사고에 각기 한 벌씩 봉안했습니다. 세종실록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활자 로 인쇄하여 이상 네 사고에 한 벌씩 분장했습니다. 태종실록은 편찬한 지 10년을 지나 세종 24년(1442)에 태종실록·정종실록과 함께 개수했습니다. 선조 37년(1604) 실록을 재출판할 때, 태종 12년 4월 25일(계유)에 기록되어 있는 호조전서 정연의 이름을 정초로 고치고, 동 16년 10월 12일(경오)의 김노의 시호 공희를 공경으로 고쳤습니다. 정공의 이름자는 선조의 어휘 ‘연’자와 같았고, 김노의 시호는 중종 의 시호와 같기 때문에 고치게 됐습니다. 

태종실록의 체제와 내용

태종실록은 실록의 일반적인 범례에 충실하게 편찬됐습니다. 그러나 즉위한 해(1400)부터 그 해 말까지의 사실은 정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전왕의 치세를 존중하는 유년칭원법의 뜻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고, 또 태종실록과 정종실록을 동시에 편찬하면서 연도의 중복을 피하기 위한 방책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태종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태조의 여러 아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조선 왕조의 개국 당시에 크게 활약했고, 이후 명(明) 나라와의 관계가 원활치 못하여 명 태조 주원장이 국교 단절을 선언했을 때, 직접 명나라 서울 금릉에 가서 명 태조와 회담하여 국교를 회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복 동생 이방석이 세자로 책봉된 데 대하여 불평을 품고, 태조 7년(1398) 8월에 왕자의 난을 일으켰습니다. 이 때 그는 태조로 하여금 그 형 정종에게 양위하게 하고, 정종 2년(1400) 11월 11일에는 정종의 선양을 받아 즉위했습니다. 태종 18년(1418) 8월 10일 아들 세종에게 양위할 때까지 18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태종은 안으로 국가의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고, 밖으로 명 및 여진 일본과의 관계를 정상화하여 국가의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그는 세종에게 양위한 후에도 병권을 놓지 아니하고 세종 원년(1419)에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정벌하여 크게 왜구를 응징했습니다. 이후 별궁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종 4년(1422) 5월에 56세로 승하했습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성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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