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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정조실록 경위와 내용

by yesG 2023.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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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실록의 편찬 경위

《정조실록》은 조선 왕조 제22대 국왕이었던 정조의 재위 기간(1776년 3월 ~ 1800년 6월)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사서입니다. 정조의 본래 묘호는 정종이었으므로 그 실록의 본래 이름도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 약칭 《정종대왕실록》이라고 했습니다. 광무 3년(1899)에 묘호를 추존 개정함으로써 그 실록도 《정조실록》으로 부르게 됐습니다. 본서 54권과 부록 2권을 합쳐 모두 56권 56책이며, 활자로 간행됐습니다. 《정조실록》은 그의 훙서 익년인 순조 즉위년(1800) 12월에 편찬하기 시작하여 순조 5년(1805) 8월에 완성했습니다. 정조대에는 정치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실록 편찬에도 특별한 곡절이 없었으며, 그 편찬 경위도 다른 실록의 편찬 사례와 대체로 같았습니다.

정조실록의 내용

정조는 영조 28년(1752)에 장헌세자 즉 사도세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영조 35년(1759) 8살에 세손으로 책봉됐습니다. 영조 38년(1762)에 장헌세자가 죄를 얻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자, 정조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뒤에 진종으로 추존, 1719~1728)의 후사로 입계됐습니다. 정조는 친부의 죽음과 시파· 벽파의 대립 갈등으로 그 지위가 매우 위태로웠으나, 홍국영 등의 보호로 난국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영조 51년(1775)부터 대리청정을 하다가 다음해 영조가 죽자 25세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24년간 유능하게 통치하다가 1800년 6월 48세의 나이에 석연치 않게 훙서했습니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곧 규장각을 설치해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한편,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홍인한·홍상간·윤양로 등을 제거했습니다. 정조 4년(1780)에는 그의 총애를 믿고 방자하게 행세하던 홍국영을 축출하고 친정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정조는 왕권을 강화하고 국가 통치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영조 이래의 탕평책을 계승했습니다. 이로써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얻었으나, 시파·벽파라는 새로운 정파의 구도가 형성되어 조선후기에 오래 동안 갈등을 벌이게 됐습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학문에 심취하였고 즉위한 후에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연구·토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발전시켰습니다. 그 결실이 바로 자신의 저술 《홍재전서》 (184권 100책)에 온축되어 있습니다. 그는 규장각을 학문·문예의 중심 기구로 하고, 여기에 홍문관·승정원·춘추관·종부시 등의 일부 기능을 부가하여 정권의 핵심적 중추로 삼았습니다. 그는 ‘우문지치를 표방하여 본격적인 문화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했습니다. 그는 유능한 학자 관료들을 우대하고 연소한 문신들을 선발하여 학문과 문예를 장려함으로써 자신의 친위세력으로 삼았습니다. 그는 《사고전서》의 수입에 노력하고 서적 간행에도 힘을 기울여 새로운 활자를 개발하기도 했습니다. 임진자· 정유자·한구자·생생자·정리자·춘추관자 등이 그것입니다. 《속오례의》·《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대전통편》·《문원보불》·《동문휘고》·《규장전운》·《오륜행실》·《일성록》· 《무예도보통지》등이 정조 대에 편찬 간행됐씁니다. 정조는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신설하고 북학파 박지원의 제자들인 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을 등용하여 그들의 실학 사상을 수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검서관들의 신분은 서얼이었는데, 그들의 등용은 영조 이래의 신분상승운동이었던 ‘서얼통청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조대는 조선후기의 문예부흥기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이는 조정의 학문 장려와 재야의 실학 운동으로 나타났을 뿐만아니라, 예술 분야에서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문학에서는 중인 이하 계층의 위항인들이 한시 분야에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옥계시사를 결성하고, 공동시집인 《풍요속선》 등을 간행하여 새로운 시풍을 날리게 됐습니다. 그림에서는 진경산수, 글씨에서 동국진체라는 조선 고유의 화풍과 서풍을 만들게 됐습닏.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비운에 죽은 생부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그의 묘를 명당이라고 알려져 있었던 수원 화산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을 조성했습니다. 이곳은 옛 수원 관아가 있던 곳이었으므로 현륭원 조성 때문에 수원을 팔달산 기슭으로 옮겨 신도시를 건설하게 됐습니다. 이것이 화성으로서 정조는 자주 이곳에 행차하였고 어머니 혜경궁의 회갑연을 화성 행궁에서 열기도 했습니다. 17세기부터 조선에는 많은 서학 서적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오게 됐습니다. 초기에는 천주교 관련 서적들이 일부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읽혀지는 정도였지만, 정조 시대에 오면 권철신, 정약종 형제, 이벽 등과 같은 신자들이 나타나게 됐습니다. 정조 7년(1783)에는 이승훈이 북경 천주 교회당에서 영세를 받았고 다음해에는 서울 남부 명례동 역관 김범우의 집에 최초의 천주 교회가 창설됐습니다. 이곳의 집회가 정조 9년(1785)에 관헌에게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됐습니다. 정조 15년(1791)에는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운 진산 사건이 있었고 정조 19년(1795)에는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정조는 천주교를 금지하기는 하였지만 심하게 단속하지 않았으므로 말년인 1800년 경에는 신도가 1만여 명으로 불어나게 됐습니다. 정조 15년(1791)에는 서울 시전 상인들의 특권을 폐지한 통공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조선후기에 사상들이 증가하면서 시전의 금난전권이 강화됐으나, 이는 물가의 등귀를 가져와 도시 빈민층의 생계를 위협하였고 난전의 활동을 근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정조 1791년에 채제공 등의 건의로 금난전권을 폐지하게 됐습니다. 정조는 1800년 6월에 훙서했습니다. 존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이며, 능호는 건릉으로 사도세자의 융릉 서쪽에 있습니다.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성립되자 1900년에 황제로 추존되어 선황제로 개칭됐습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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